손정의 비록

오시타 에이지 지음 / 김선숙 역 / 성안당 펴냄

 

 

  1978년 9월 23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우주과학연구소를 방문했다. “야~ 해냈다!” 차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좋아했다. 하지만 손 정의는 들뜬 기분을 가다듬었다. 상품화하려면 기업이 만들어야 했다. ‘최종적인 계약 상대는 샤프다!’ 샤프 사사키 전무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청년은 대단한 인물이 될 게 분명하다.’ 손 정의는 아사다 본부장에게도 설명했다. 거기서 오케이가 나서 첫 번째 계약에 도달했다. 이것이 샤프에서 세계 최초로 판매하기 시작한 전자번역기 ‘IQ3000’이다.

 

  손 정의는 어느 날, 전자 전시회라는 가전 전자업계 전시회가 열린 다는 것을 알고 소프트뱅크 자본금 1,000만 엔 중, 800만 엔을 투입해 전시회에 출전하기로 했다.

“장소를 빌리고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전시할 소프트웨어만 가지고 오세요.” 이 파격적인 조건을 들은 메이커의 담당자들은 한결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시회 기간 동안 마츠시타나 소니의 부스보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부스는 대성황을 이뤘다.

 

  가전 판매 업체 죠신전기와 독점 계약을 맺고는 소프트웨어 일본 1위인 허드슨을 뽑았다. “허드슨이 왜 갑자기 크는 거지?” 그것은 일본소프트뱅크 덕이라는 소문이 난 것이다. 손 정의는 말했다. “우리 회사는 언젠가 두부를 세듯 1조, 2조 단위로 매출을 올릴 것입니다.” 그 당시 손 정의는 ‘컴퓨터 업계의 신데렐라 보이’라 불릴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손 정의는 평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수익을 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매출액 - 경비 = 수익이다. 총매출액 이상으로 경비를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 간단한 원칙만 머리에 넣어두면 된다.

  2006년 4월 소프트뱅크는 결국 영국 보다폰이 경영하는 보다폰 저팬을 인수했다. ‘보다폰과 일본텔레콤 브랜드명을 소프트뱅크로 통일시키면 어떨까?’ 소프트뱅크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통신 3사가 소프트뱅크 중핵사업체라는 의사 표명이기도 했다.

 

“자금은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아델슨 회장이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그러면서 왜 컴덱스를 사려는 거죠?”

“컴퓨터 업계가 좋아서요.”

손 정의는 컴덱스 아델슨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년 전에 약속한 대로 컴덱스를 사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만나 주시죠.”

손 정의는 간부들에게 말하곤 했다.

“설득하기 가장 어려운 상대는 자기 자신이다.”

1994년 4월, 손 정의는 인터페이스 그룹 부문 컴덱스 인수를 발표했다.

 

  “지프 데이비스에 출자하지 않았더라면 야후를 찾아냈다 해도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보물섬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선물을 받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받고 싶은가? 음식인가, 소총인가, 약인가 그것도 아니면 애인인가? 손 정의라면 아마도 지도와 나침반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프 데이비스는 손 정의에게 있어 야후라는 거대한 보물섬을 파내려 가기 위한 지도와 나침반이었던 것이다.

 

  손 정의는 책임자 3명을 불러 진행 상황을 물었으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사업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내가 직접 진두지휘를 해야겠는 걸.”

임원회에서도 대소동이 일어났다. “미친 짓!”이라 말하는 분위기였다.

손 정의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날 따라 올 자만 따라와라!’

손 정의는 IP만을 이용한 기본설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ADSL 회선이 처음 개통 된 것은 2001년 봄이었다. NTT가 1.5메가의 통신 속도인데 비해, 최대 4배 이상의 통신 속도인 8메가를 실현 시켰다. 논리적으로 옳은 기술이 실제적으로 사용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2004년 10월 18일, 손 의는 후쿠오카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날 아침, 놀랄만한 기사가 떴다.

“소프트 뱅크, 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 인수 의사 포명, 다음 시즌 준비할 예정이다.” 아사히신문이 밝힌 것이다. 11월 15일 다이에와 구단주 양도 계약을 맺은 소프트뱅크는 11월 30일 일본 프로야구조직에 참가신청을 마치고 프로야구 첫발을 내딛었다.

  오 사다하루(王貞治)는 반세기에 걸친 야구 인생에서 다양한 일본의 구단주를 보아왔다. 대부분의 구단주들은 야구 경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영어로 말하는 ‘러브 베이스볼’의 ‘러브’가 없었다. 야구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구단주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에 흥미를 갖고 있는 손 정의가 구단주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손 정의는 현장에 관한 일은 모두 오 사다하루에게 일임했다.

“어쨌든, 야구에 대한 것은 모두 맡기겠습니다. 마음껏 뜻을 펼쳐 주십시오.”

 

  2000년 겨울 손 정의와 마윈은 베이징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마윈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손 정의는 5분 정도 듣고는 ‘당신 얘기는 이제 그만하라’고 제지했다. 마윈의 힘 있게 울리는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손 정의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당신 얘기는 이제 그만해도 됩니다. 자본을 투자하고 싶은데, 35퍼센트 어떻습니까?”

마윈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며 기쁨이 눈가에 번졌다. 2000년 1월 2,000만 달러, 일본 돈으로 20억 엔을 출자했다. 마윈이 필요로 한 자금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손 정의는 알리바바 닷컴의 수석 고문이 되었다.

 

  소프트뱅크의 여정에도 수많은 위기가 있었다. 사원이 집단적으로 소프트뱅크를 떠나버린 일도 있고, 인터넷 버블이 붕괴되어 소프트뱅크의 주가가 백분의 일로 폭락해 버린 적도 있다. 사내에 이상한 분위기가 떠돈 적도 있었다. 거듭되는 어려움에 “이제 끝이 왔다.”고 포기하려던 사원도 있었다.

“두들겨 맞을수록 우리는 더 단단해진다. 그러니까 오히려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손 정의의 끈기와 개혁정신이 소프트 문화로 정착되어 간다면 소프트뱅크는 반드시 계속 성장해 갈 거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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