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아픔

박경리 지음/ 마로니북스 펴냄

 

 

 

 

   자본주의의 본질은 끝없는 이윤 추구 바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시간과 물자와 인 력을 포함한 에너지, 이 세 가지를 집약하여 조작하는 이른바 생산은 자본주의의 결실 인 상품으로 나타난다. 해서 자본가들의 공간 개념은 지구도 자연도 아니며 국토도 아 니며 상품이 유통되는 시장이라 할 수 있겠다.

 

   논이며 밭이며 숲 할 것 없이 머지않아 아파트를 위시하여 각종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설 판인데 새들은 어디로 가서 둥지를 틀 것이며 억조창생, 생명들이 참살을 당하 게 생겼으니.

   언덕에는 달맞이꽃이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었다. 길 왼편에는 잡초가 우거진 논이 펼쳐져 있었는데 백로 식구 세 마리가 역시 연약하고 귀스러운 그 순백의 모습을 드러 내놓고 있었다. 창조의 오묘함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친다. 그러나 곧 달맞이꽃은 땅속 으로 묻혀 생을 마감할 것이며 백로는 어느 곳으로 식구를 거느리고 떠날 것인가. 진정 이것은 감상일까.

 

  우리는 칸트, 헤겔을 위시하여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독일인인 것을 기억한다. 그 들 철학자, 예술가들은 거짓의 토양에서는 자랄 수가 없다. 진실을 추구하는 그들 후예 들이 나치의 범죄를 보상하고 오욕을 씻어낸 것이다. 일본은 거짓의 두 기둥을 박아놓 고 국민을 가두어왔다. 하나는 천조의 상속권 주장인 만세일계요, 다른 하나는 현신인 으로 왕을 치장한 신도다. 나고 죽는 우주 질서에서 일왕도 예외가 아니거늘 어찌하여 신으로 칭하는 걸까. 거짓은 만사를 거짓으로 만든다.

 

   다나카 씨가 가장 말하고 싶어 했을 마지막 대목은 아마도 노태우 대통령 방일시의 과거에 대한 사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다나카 씨는 “도대체 마음의 문제를 외교 레벨 에서의 사죄로서 풀 수 있었을까요?”했다. 결국 사죄는 무의미한 것이며 사죄의 필요성 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데, 나 역시 사죄 따위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 한다. 나는 그 무렵 “사죄 따위의 말은 필요 없다. 우리 민족이 흘린 피 값, 내 나라에 서 약탈해 간 귀중한 것들을 내놔라 해야 해.”하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가난한 나 라로구나. 잘못을 사과할 용기조차 없는 그들.

 

   나는 젊은 사람에게 더러 충고를 한다.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 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 한다.”

 

   21세기는 고도의 기술이 지구 복원에 집약되어야 하고, 순환하고 환원되는 새로운 질 서를 강구해야 하며, 삶의 질을 내용에서 높여가야 지구 사막화 인간 사막화에서 우리 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상매체나 첨단으로 치닫는 시대에 신문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럴 때 신 문은 다시 선도적 역할, 희망적 존재로서, 인류 생존을 위한 보다 본질적인 문제 삶의 터전에다 말뚝을 박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