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나를 깨우다

이석명 지음 / 북스톤 펴냄

 

 

 

“쓸모없음을 안 이후에 비로소 쓸모 있음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 머물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머물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렇게 처신하기도 어렵지만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유위에 불과하고, 유위의 행위는 결국 화를 불러오게 된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란, 이 둘을 초월하는 도의 자리를 가리킨다. 도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화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마라. 어느 경우든 내 삶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길, 그 길이 진정한 쓸모로 가는 길임을 명심하라.

 

  노나라에 외발이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무리가 공자에 버금갔다. 상계가 공자에게 물었다.

“왕태는 외발이 불구자입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는 무리가 선생님을 따르는 무리와 노나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에 나서서 가르치지도 않고 앉아서 사람들과 토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텅 빈 채로 왔다가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진실로 그에게 말 없는 가르침이 있어 은연중 사람들의 마음을 완성시켜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왕태 선생은 성인이다. 나는 꾸물거리느라 아직 찾아뵙지 못했을 뿐이다. 나 또한 그분을 스승으로 받들 터인데 하물며 나보다 못한 자들이랴! 어찌 단지 노나라 사람들뿐이겠는가.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그를 따를 것이다.”

  몸이 불구라 해서 마음까지 불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몸이 온전하지 못함보다는 마음이 온전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마음이 온전하지 못함보다는 덕이 온전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혹시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 생각해보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어떤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친다면, 비록 성질 급한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소리쳐 비키라고 할 것이다. 한 번 외쳐서 듣지 않고 두 번 외쳐서 듣지 않으면, 세 번째는 반드시 욕설이 따를 것이다. 이전에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화를 내는가? 이전에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운 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비우면 편안하다. 배 속을 비우면 육신이 편안하고, 마음을 비우면 정신이 평온하다. 샘을 자주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솟아오르고, 마음을 자주 비워야 영혼이 투명하고 맑아진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연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인간의 의지로는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주어진 환경과 조건 중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달생』편에서도 말한다. “삶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삶에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운명에 통달한 사람은 운명상 어찌할 바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애써 힘쓰지 않는다.”

 

  죽음! 이것은 달구어진 쇠처럼 아주 단단한 단어다. 거기에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삶의 힘겨움이 담겨 있다. 미래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 그것은 우리 모두 결국 터널의 ‘끝’, 즉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죽음은 낯선 것이 아니기에 더 두렵고 불안하다. 그래서 피하려 하고, 잊으려 하고, 애써 간과하려 한다.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이 운명적 고민! 이 때문에 일찍부터 수많은 사상가들이 죽음에 대해 성찰해왔다.

 

  장자의 수양론은 ‘마음 기름’이 아니라 ‘마음 비움’에서 시작된다. 마음에 덮이고 쌓여 있던 비본래적인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순수 자연의 상태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편견 없는 시야를 확보해 사물의 진상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마치 거울이 맑으면 오가는 사물들이 그대로 비치듯이 말이다.

  비우고 또 비워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는 상태가 ‘심재’이고, 그 비움마저 잊어버린 상태가 바로 ‘좌망’이다.

 

  옛날의 진인은 삶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았다. 세상에 나오게 되어도 좋아하지 않았고 저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어도 거부하지 않았다. 홀연히 오고 홀연히 갈 뿐이었다. 자신이 비롯된 시원을 잊지 않지만 그 끝을 알려 하지도 않았다. 삶을 받으면 기쁘게 받고 삶을 잃으면 무심히 되돌아갔다. 이런 태도를 가리켜 마음에 의해 도를 손상시키지 않고 인위에 의해 자연을 간섭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이 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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