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최준식 지음 / 시공사 펴냄

 

 

 

  가장 중요한 일은 ‘나는 누구인가’, ‘진정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은 누구인가’와 같은 삶의 진지한 문제를 말한다. 불치병에 걸려 임종을 몇 개월 앞에 두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일생 동안 해왔던 세속적인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중요한 질문을 죽음

앞에 서야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고 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의 도피>라는 책에서 결론 격으로 내놓은 주장은 ‘인간은 자유를 희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로부터 도망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자유로운 상태를 싫어하고 그로부터 도망가려 하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최면 상태뿐만 아니라 평상시 각성 상태에서도 줏대 없이 살고 있다. 다시 말해 별 생각 없이 사회의 통념이 제시하는 대로 그냥 부유하면서 산다. 사실 확실한 줏대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사회에서 몇 명 되지 않는다. 사회의 유행이나 통념에 휩쓸려 중심 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깨어 있기란 정말로 어렵다. 또 본인이 깨어 있다 쳐도 깨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가만 두지 않는다.

 

 

  유대인 학살의 주인공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난 뒤 전범 재판에 나와 납득할 수 없는 증언을 한다. 즉 자신은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고 이와 관련해서 한 점의 잘못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아이히만은 자신은 명령을 받아 수행한 것뿐이며 그 명령을 제대로 이행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믿을 수 없는 말도 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마음의 가책을 가졌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오는 명령 혹은 지시이지, 자기 내부에서 오는 판단이 아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외부의 틀에 맞추어 살았던 것이다.

 

  프롬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아주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제안했다. 예를 들어, 그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남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그치게 하기 위해 ‘유행어 쓰지 않기’ 같은 것을 제안했다. 아주 세세한 것인데 이런 데에서부터 정신 차리자는 것이다. 어떤 유행어가 크게 유행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유행어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르고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인간들은 거의 대부분이 주위에 휘둘려 살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 같은 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명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명상의 단점들을 부분적으로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최면법이 그것이다.

 

  자기를 초월하려면 먼저 자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일단 자기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 자기는 어떤 방식으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최면법을 소개하고 싶다. 지금까지 접한 동서양의 종교나 심리학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 가운데, 최면법이 자기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면을 통해 우리는 무의식 세계를 접할 수 있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의 의식 안에 자아를 방어하는 기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이 방어기제가 대폭 약해진다. 우리는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많이 저항 하지만 최면 상태에서는 최면사의 이야기를 잘 따른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피최면자는 자신이 무의식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최면을 정통 의술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사술처럼, 혹은 마술처럼 인식되고 있는 까닭은 대부분 텔레비전에 나오는 최면사들의 모습과 관련 있을 것이다. 최면을 통해 연예인들의 전생을 캐는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최면법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는 해도, 일반인들에게 최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으니 문제다. 최면이라는 게 그리 쉽게 걸리는 것도 아니고 최면사가 피최면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면이 한국에서는 이렇게 오해되고 있는 데 반해 미국 의학계에서는 진즉에 정통 의술로 인정받았다. 최면학은 나름대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의학협회에서 정식 의술로 인정받은 것은 1958년이라는 깨 이른 시기였다. 곧이어 1961년에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도 최면이 인정된다.

 

  인간은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면 -간단한 예가 수면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최면은 아무리 깊은 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최면사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 대화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최면이 아니다.

  그다음 오해는 최면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밝혀두어야 할 것은 최면은 본인이 걸리지 않겠다고 저항하면 결코 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면이란 최면사가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면 시 피최면자가 원하면 결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는다. 텔레비전 최면쇼에서처럼 피최면자가 최면사가 하라는 대로 모두 따라 하는 것은 피최면자가 자의하에 자신의 주도권을 최면사에게 일부 양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떤 주제든 그 연구의 역사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최면학계에서는 최면치료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 정도의 접근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지시적 스타일과 허용적 스타일, 에릭슨적 스타일이 그것이다.

   지시적 스타일 우리가 방송에서 가장 많이 보던 것인데 일반인들은 최면을 대체로 이 스타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최면에서 깨어나면 (불안한) 증세가 사라질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지시하는 방법으로, 서양 최면학계에서는 이 방법이 19세기까지 가장 많이 쓰였다.

  허용적 스타일 현재 거의 대부분의 최면사들이 쓰는 방법으로 의사와 환자가 협력해서 치료를 같이 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방법에서 의사는 더 이상 지시자가 아니라 안내자와 협력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에릭슨적 스타일 대단히 독특하다. 그의 최면법은 위의 두 방법이 잘 듣지 않는 사람에게 적합하다고 하는데, 우선 최면감수성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면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내담자로 하여금 몰두하는 상태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의 최면법은 정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따라 하기가 매우 어렵다.

 

  최면은 피최면자가 다른 어떤 의식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정신이 집중된 상태가 된다는 것이 일반 최면학계의 설명이다. 이때 우리는 밖에서 주어지는 암시에 쉽게 영향 받는 상태가 되는데,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의식과 무의식이 분열 혹은 해리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의식과 무의식이 나누어져 각기 활동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의식에 있는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면이 집중 상태를 유도한다는 것이다.(PP.223~224)

 

  최면은 간단하게 보면 3단계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순서대로 보면 ‘유도 -> 탐구(혹은 암시) -> 각성’의 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인 최면 유도는 내담자의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유도 단계와 탐구 단계를 생각해볼 때 이 두 단계가 확실하게 구분된다고 할 수는 없다. 만일 내담자가 무의식 상태에 가까워졌다고 판단되면 다음과 같은 암시를 줄 수 있다. 최면사가 계속해서 암시를 주어서 내담자가 가장 가보고 싶어 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곳을 이미지로 떠올리게 해 상상 속에서 작업을 하게 하는 것이다. 들판이든 바다든 아무 상관 없다. 이는 최면을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다.

  각성 단계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어도 될 것 같다. 그냥 깨어나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마치며

밤중에 스승과 제자가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달이 밝아 마음은 이를 데 없이 차분해졌다.

“스승님,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네가 정말로 그걸 알고 싶으냐?”

“네에···”

“허허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면서 살면 된다.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그러니 아무 걱정할 곳 없다! 허허허···.”

순간 제자는 마음이 덜썩 내려앉았다. 마음이 탁 터지고 갑자기 자유가 찾아왔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면 된다는데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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