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모험(Business adventures)

존 브룩스 지음 / 이충호 옮김 / 쌤앤파커스 펴냄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에드셀의 사망 기사

  큰 회사들은 흔히 시장을 조작하고, 가격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소비자를 강요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어제 포드자동차회사는 2년에 걸친 중간 가격대 자동차 에드셀의 실험이··· 판매 부진 때문에 끝났다고 발표했다. 이 모든 것은 시장을 조작하거나 소비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도록 강요할 수 있는 자동차 회사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히 취향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데 있다. ··· 강요에 관한한, 소비자는 필적할 자가 없는 독재자이다.

  이 기사의 논조는 우호적이고 동정적이었다. 포드자동차회사는 위대한 미국 시추에이션 코미디에 나오는 실수투성이 아빠 역할을 함으로써 <월스트리트저널>의 호감을 산 것처럼 보인다.

 

  미술 작품의 형태를 띠건 돈이나 기타 재산의 형태를 띠건, 고소득자의 기부 행위에 드는 비용이 이토록 낮은 것은 소득세법이 낳은 기묘한 열매 중 하나다. 세율 60%가 적용되는 고소득자가 현금 1000달러를 기부하면, 실제로 이 사람이 지불하는 비용은 400달러이다. 그런데 만약 동일한 사람이 같은 1000달러를 처음에 200달러에 산 주식으로 기부한다면, 실제로 든 순비용은 200달러에 불과하다. 연소득이 100만 달러나 되는 사람들이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사례들은 대부분 소득세법이 거액 기부를 적극 장려한 덕분이다.

  최근에 지출세를 숭배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지출세는 고려해볼 만한 아름다운 아이디어입니다. 소득세의 함정을 거의 다 피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꿈이지요.” 정말로 그렇다, 서구권에서는. 그런 세금은 지금까지 인도와 실론(현재의 스리랑카)에서만 도입되었다.

 

  증권거래위원회를 행동에 나서게 만든 사건은 1959년 4월에 뉴욕 시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황 생산업체 텍사스걸프가 캐나다 순상지를 항공기로 지질 탐사하면서 시작되었다. 텍사스걸프 직원들이 발견한 수백 군데의 자기 이상은 지상 탐사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망한 곳은 그들의 지도에 키드-55 구역으로 표시된 곳이었다.

  1963년 11월 8일에 첫 번째 시추공을 뚫기 시작했다. 광업에 특별한 지식을 가진 캐나다의 한 증권 중개인은 나중에 그만한 길이와 그 정도 광물 함량을 가진 코어는 “그 누구의 상상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하순에 내용물의 성분과 함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시추한 코어를 유니언성분분석소에 보냈고 텍사스걸프는 키드-55의 나머지 땅을 매입하기 위해 은밀히 손을 쓰기 시작했다. 주식 매입은 특정 임원들과 직원들 그리고 심지어 그 친구들 사이에서 곧 몰아닥칠 텍사스걸프 주식 매수 열풍을 암시하는 조짐에 불과했다.

  1964년의 처음 석 달 동안 다크는 텍사스걸프 주식 300주를 노골적으로 매수하고, 콜 옵션으로 3000주를 더 샀으며, 점점 불어나는 자신의 티피 명단에 형제를 포함해 여러 사람을 더 집어넣었다. 1963년 11월 12일에서 1964년 4월 16일 오전 사이에 텍사스걸프 주식을 산 사람들은 모두 투자한 금액이 최소한 3배 이상 불어난 셈이었다.

 

  보도 자료에 대해 본설 판사는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비관적’이고 ‘불완전’하다고 보았지만, 그 목적은 그 당시 떠돌고 있던 과장된 소문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인정했고, 증권거래위원회는 그것이 틀렸거나 오도했거나 기만적이었음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따라서 그는 텍사스걸프가 의도적으로 주주와 일반 대중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고소를 기각했다.

 

 

  제록스라는 신흥기업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거대 기업인 US스틸이나 크라이슬러, 프록터 앤드 갬블, RCA를 추월했다. 실제로 제록스에 대한 일반 투자자들의 열광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주식은 1960년대 주식시장의 골콘다(무진장의 부라는 뜻)가 되었다.

  윌슨이 가장 열성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한 주제는 제록스의 비영리 활동과 기업의 책임에 관한 자신의 이론인 것 같았다. “이 점에서 우리에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고 불평하는 주주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지역 사회 이야기입니다. 그런 말이 실제로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가끔 사람들이 ‘벼락출세한 이 젊은이들(제록스 덕분에 돈방석에 앉은 로체스터 대학교)은 도대체 자신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직관적으로 듭니다.”

 

  뉴욕증권거래소 회원인 아이라 하우프트 증권회사의 대표 파트너 모턴 카머먼이 아는 바로는 하우프트의 자본 준비금이 유욕증권거래소가 회원사들에게 요구하는 기준 아래로 떨어졌으며, 규정에 따라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카머먼이 이 놀라운 사실을 전달하고 있을 때, 비숍은 가까운 사무실에서 중요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우프트의 도산이 임박했다는 소문 때문에 이미 주식 시장이 동요하고 있을 때, 대통령 암살 소식이 왜곡된 형태로 뉴욕증권거래소 입회장에 처음 전해졌다. 만약 하우프트가 파산한다면, 그 심리적 효과는 시장에 매도물량으로 쏟아져 나올 하우프트의 상당한 자산이 미칠 명백한 효과와 함께 그렇지 않아도 중대한 국가적 위기로 크게 하락한 주식 시장에 큰 악재로 작용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비단 하우프트 고객들의 안녕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녕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다. 펀스턴이 제시한 계획은 뉴욕증권거래소와 그 회원들이 충분한 자금을 마련해 모든 하우프트 고객의 현금과 증권을 변상해 주자는 것이었다.

   채권자들 중 큰 비중을 차지한 곳은 명망 높은 현지 은행 네 곳인 체이스맨해튼, 모건 개런티 트러스트, 퍼스트 내셔널 시티,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였는데, 이들은 하우프트에 약 1850만 달러를 빌려주었다. 일요일 오후 2시, 이번엔 로스앤젤레스, 미니애폴리스, 피츠버그, 리치먼드에서 온 사람들까지 보강된 뉴욕증권거래소 이사들은 회원사 대표 30명과 함께 합동 회의를 열었다. 지금까지 합의된 사항들을 설명한 뒤, 그들은 표결을 통해 만장일치로 그것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뉴욕타임스>는 그 합의에 대해 “투자자의 신뢰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공항을 초래할 수도 있는 사태를 예방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라고 평했다.

 

   손더스는 셀프서비스 소매점 체인을 만들었고, 피글리위글리 스토어스는 아주 큰 성공을 거두어 1922년 가을에는 점포수가 1200개를 넘어섰다. 하지만 이러한 명성은 오래 가지 않았다. 피글리위글리 간판을 내걸고 식품잡화점을 운영하던 작은 회사 여러 곳이 도산하여 관리 상태에 들어갔다. 이 회사들은 손더스의 회사하고는 직접적으로 별로 관련이 없었다. 그러자 주식은 몇 주일 만에 약 50달러였던 주가가 4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손더스는 자신이 대대적인 주식 매수 캠페인을 벌여 “월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을 그들이 벌인 게임에서 무릎 꿇게 할 것”이라고 언론에 발표했다. 손더스 자신은 전문 투자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곰들과 첫 번째 전투에 나선 날, 손더스는 중개인들의 가면 뒤에 숨어 움직이면서 피글리위글리 주식을 3만 3000주 매수했는데, 대부분 공매도를 한 사람들로부터 사들였다. 손더스의 주식 매수 캠페인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1923년 1월 주가는 60달러 이상으로 올랐는데 역대 최고 가격이었다.

  2월에 발표한 광고에서 그는 일반 대중은 일단 25달러를 지불하고 나머지 30달러는 10달러씩 분할 지불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주식을 살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게다가 더 중요한 조건은 마지막 대금이 지불되기 전에는 주권을 매수자에게 넘겨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손더스는 자신의 주식 판매 제안을 곧 중단할 것이라는 신문 광고를 내보내면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렸다.

  우연의 일치로 피글리위글리 스토어스의 연례 회계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그것은 매출, 이익, 현재 자산을 비롯해 모든 주요 수치가 전년보다 크게 높아져 매우 양호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너는 실패했고, 그는 은행들의 신디케이트에 큰 빚을 졌으며, 미래가 위태로운 주식만 잔뜩 쥐고 있었다.

 

  컨솔리데이티드 에디슨의 이사회 의장이던 할랜드 포브스는 뉴욕에서 한 방해꾼에게 회의장에서 나가라고 명령했고, 필라델피아에서는 AT&T의 이사회 의장 프레더릭 캐펄이 귀찮은 방해꾼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돌연히 “이 회의는 로버트 의사 진행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 게 아닙니다. 이 회의는 내가 운영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이론적으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근본적인 힘을 지닌 사람들이 이제 그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주저앉게 될 것처럼 보인다.

   대체로 스스로 임명한 것이긴 하지만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대다수 주주들의 유일한 대표가 된다. 전에 홍보 일을 했던 소스 부인은 1947년부터 지칠 줄 모르는 전문 주주로 활동하고 있는데, 대개는 훌륭한 수준의 활동을 보여준다. 그녀는 완강한 의장을 조롱하다가 회의장에서 쫓겨나는 데 가끔 성공한다.

  고도 9000m 상공에 있으면 시야가 무척 넓어지는데, 그렇게 필라델피아 상공을 지나가는 동안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회사 경영진과 주주들이 리어왕이 배운 교훈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반대자의 역할을 어리석은 사람에게 맡긴다면, 모든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도널드 올게무스는 1962년 가을 당시 미국 민간 회사의 연구개발 분야에서 아주 훌륭하게 자기 업무를 수행하던 수천 명의 젊은 과학자 중 한 명으로, 오하이오 주 애크런에 있는 B.F, 굿리치 컴퍼니에서 일했다. 대체로 그는 성공한 평균적인 미국인 젊은이로 보였다.

  그런데 11월 첫째 주에 올게무스는 뉴욕의 한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올게무스는 라텍스가 얼마 전에 아폴로 계획, 즉 달에 인간을 보내는 계획에 사용할 우주복 연구와 개발을 위해 약 75만 달러에 이르는 하청 계약을 따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출근해서 맨 먼저 한 일은 직속 상사인 칼 에플러에게 면담을 신청해 그 달 말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이라고 통보한 것이었다.

  굿리치 대 올게무스 사건 재판 결과에 수천 명의 과학자와 수십억 달러의 돈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는 자연히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비 판사는 제시된 증거와 변호사들의 최종 변론을 들은 뒤, 결정을 나중으로 미루면서 임시적으로 올게무스에게 문제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라텍스 우주복 개발 부서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변호사들 사이에 벌어진 ‘개는 물기 전에는 모른다.’ 논쟁을 검토한 뒤에 하비 판사는 피고가 나쁜 의도를 가졌다는 분명하고도 실질적인 증거가 없는 한, 그런 비밀 누설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는 기업 비밀 누설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항고 법원의 결정은 5월 22일에 나왔다. 아서 도일 판사가 두 동료 판사와 의견 일치를 통해 작성한 그 결정은 하비 판사의 결정 중 일부를 뒤집었다. 간단히 말해서, 올게무스는 굿리치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마침내 라텍스의 우주복 개발 부서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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