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아내가 있다.

전윤호 지음 / 세종서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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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혼자 깨어_도굴범

잠든 아내를 바라본다

가슴 위에 가지런히

가는 손목을 잡아본다

종일 몸살이 났다더니

먼저 누웠다

새벽 내 출근시간에 맞춰 놓은 사발시계가

그녀의 부장품이다

순장당한 그녀들이 꿈들이

여기저기 반짝이며 널려있다

아직도 파 냄새가 난다

깊고 후텁지근한 내 고분

들개처럼 쪼그려 앉아

밤을 샌다

아내

너는 나의 전선 열두 척

중과부적의 바다에

달아나지 않는

마지막 함대

 

죄 없이 매 맞고

누명으로 우는 밤

절대 가라앉지 않는

천년의 용굴

 

새벽에 다시 일어나

여윈 북채 잡을 때

너는 흔들리는 돛대 위에 오르는

붉은 독전기 

 

숲의 구성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참나무는 참나무끼리

숲을 이룬다

두 아들과 아내가 등산로 계단에 서서

손을 흔든다

잘 자란 나무들 같다

아빠 빨리 와

사진 찍어줘야지

나는 손을 흔들고

식은 땀을 흘리며 배경이 되려 뛰어간다

 

손톱

나 같은 얼간이에게

사랑은 손톱과 같아서

너무 자라면 불편해진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웃자란 손톱이 불편해 화가 난다

제 못난 탓에 괴로운 밤

죄 없는 사람과 이별을 결심한다

손톱깎이의 단호함처럼

철컥철컥 내 속을 깎는다

아무데나 버려지는 기억들

나처럼 모자란 놈에게

사랑은 쌀처럼 꼭 필요한 게 아니어서

함부로 잘라버린 후

귀가 먹먹한 슬픔을 느끼고

손바닥 깊숙이 파고드는 아픔을 안다

다시 손톱이 자랄 때가 되면

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쥐뿔

난 얼치기 사기꾼

쥐뿔도 없으면서

사람을 낚으려 하지

종일 기다려도 빈 바구니뿐이었던

내게 걸린 단 하나의 월척

운이 좋으면

소도 뒷걸음치다 쥐를 잡지만

그 반대라면

나 같은 남편을 만나는 법

한 번의 선택에 두 아들을 떠안고

살기 위해

종일 남의 집들을 방문하는

당신은 내 인생의 고발자

보상할 수 없는 죄책감에

당신의 머리맡에서

불면의 종신형을 살고 있다네

 

아버님 전상서

난산 끝에 얻은 아들이 보채

밤마다 안고 긴 여행을 합니다

기저귀들이 하얗게 빛나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보면

문득 거울에 비치는 제 등이

당신을 닮았습니다

산고에 지친 아내는 새우잠을 자고

종일 설사한 아이는 마른 입술로 웁니다

당신이 묻힌 파도가 달려옵니다

배들이 모두 묶여 있는 부두를 지나서

방파제 끝까지 걸어가보아도

등대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절 용서하지 않으셨나요

안개 속에 아이는 잠들고

전 터벅터벅 돌아갑니다

젖은 발로 아내의 머리맡을 밟으면

긴 무적이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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