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신뢰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 마도경 편역 / 원앤원 펴냄

 

 

오직 자신의 일을 하면 강해진다.

  이미 죽어버린 관례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힘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 낭비이며 우리 개성을 흐린다. 혼이 없는 교회에 계속 다니고, 혼이 없는 성서 공회에 헌금하고 정부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당파심으로만 투표하고, 못된 가정부처럼 밥상을 차리는 등 이런 모든 가리개가 처져 있으면 당신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올바른 삶을 사는 데 필요한 큰 힘이 빠지게 된다.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순응의 게임이 어떤 종류의 술래잡기인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억지웃음과 거짓 칭찬은 하지 말자.

  살다보면 우리는 유난히 굴욕적인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역사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어리석은 칭찬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재미없는 대화를 할 때처럼 불편한 모임에서 짓는 억지웃음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때 우리의 근육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어떤 의도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 얼굴의 윤곽은 감정이 잔뜩 배어 있는 기분 때문에 경직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겉모습은 개의치 말라.

  만약 오늘 내가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나는 이제까지 지금의 나를 방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이 올바른 일을 실천했던 덕분일 것이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되든 지금 현재 올바른 일을 하라. 언제나 겉모습은 개의치 말라.

 

 

현재에 살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소심하고 미안해한다. 그는 더 이상 꼿꼿이 서 있지 못한다. 그는 감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러저러하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하며, 고작 성인이나 현자들의 말을 인용할 뿐이다. 그는 풀잎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 앞에서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내 창문 밑에 놓인 장미들은 예전에 피었던 장미들이나 더 아름다운 장미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지금 보여 지는 모습 그대로의 장미일 뿐이다. 그들은 신과 함께 오늘 존재하고 있다. 이것들에게 시간은 의미가 없다. 단지 이곳에 장미들이 있을 뿐이다.

  그 장미가 존재하는 매 순간, 장미는 완벽하다. 장미의 일생은 잎눈이 발아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장미가 활짝 핀 다음에 더 많은 삶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며, 잎이 없는 뿌리 상태에서 삶이 적은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에나 한결같이 장미의 본성은 충족되며, 장미 역시 자연을 충족시킨다. 모든 순간이 똑같다.

 

  하지만 인간은 미루거나 기억하고 현재에 살지 못한다. 회상의 눈으로 과거를 한탄한다. 또는 자신을 둘러싼 풍요로움에는 무관심한 채 까치발로 서서 미래를 내다보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시간을 초월해 현재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을 때까지 행복하고 강해질 수 없다.

 

나만의 단호한 주장과 완벽한 세계

  이제 당신은 아버지, 어머니, 사촌, 이웃, 마을, 고양이와 개와 만족스러운 관계를 수립했는지 생각해보라. 이들 중 누군가가 당신을 호되게 나무랄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나는 또 이런 반성의 기준을 무시하고 스스로 죄를 사할 수도 있다. 나에게는 나만의 단호한 주장과 완벽한 세계가 있다.

 

   이것에 따르면 의무라고 불리는 임무들 중 상당수는 의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만약 모든 빚을 털어버릴 수 있다면, 대중의 규칙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규칙이 느슨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에게 나중에 그 규칙이 강요하는 계명을 지키도록 하라.

 

영혼은 여행자가 아니다.

  이탈리아, 잉글랜드, 이집트를 우상시하면서 여행을 미신처럼 떠받드는 풍조가 모든 미국 지식층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 문화의 결핍 때문이다. 그들은 상상 속에서 잉글랜드, 이탈리아 또는 그리스를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는 순전히 그들이 현재 있는 곳에 마치 지구의 축처럼 죽치고 앉아 있음으로써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 때, 지금 우리 집이 나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곳이라고 느낀다. 영혼은 여행자가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집에 머문다. 또 필요성과 의무 때문에, 혹은 어떤 일이 생겨 그가 집 밖으로 나와야 하거나 다른 나라로 가야 해도 여전히 집에 머문다. 타인 앞에서도 자신은 지혜와 미덕의 사절로 가는 것이며, 무단 침입자나 하인이 아니라 줏대 있는 사람으로서 도시들을 방문하고 사람들을 만난다는 뜻을 표정으로 나타낸다.

 

남을 모방하지 말고 내 생각을 고집하라.

  우리들의 집은 외국의 취향으로 지어진다. 집의 선반은 외국에서 가져온 장식품으로 치장되어 있다. 우리의 의견, 취향, 능력은 ‘과거’와 ‘먼 곳’에 의존하고 따른다. 영혼은 예술이 번성했던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예술을 창조했다. 예술가가 추구하는 자신의 모델은 그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예술은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야 할 대상과 주시해야 할 상황에 적용하는 일이다. 그러데 왜 우리는 도리아 양식과 고딕 양식을 모방해야 하는가? 아름다움, 편리함, 웅대한 생각, 기발한 표현 등은 다른 것들만큼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리고 만약 미국의 예술가가 희망과 사랑으로 기후, 흙, 낮의 길이, 사람들의 욕구, 정부의 관습과 형태 등을 고려해 자신이 해야 할 바로 그 일을 연구한다면, 그는 이 모든 요소들이 들어맞으면서도 사람들의 취향과 감정도 충족되는 그런 집을 지을 것이다.

  남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라. 당신이 평생 키워오고 축적시킨 힘으로 매 순간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빌어온 재능은 미봉책일 뿐이며, 당신은 그것을 기껏해야 절반만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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