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지배하라

오승환 말하고 이성훈·안준철 적다) / RHK 펴냄

 

 

  중3이 되자 전국에 내 이름이 소문났다. 한서고등학교 팀의 공중분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아 의욕적으로 전력을 정비하던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수능 언어 영역의 답 대신, 인생의 답이 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과 짙은 불안을 안고, 나는 단국대 대학생이 됐다. 11월 중순 팔꿈치로 수술대에 올랐다. 재활에 필요한 재능이 바로 미련한 끈기였다. 코치님들은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왜 멈췄다가 던지냐’고 걱정하셔서 나도 고쳐보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공만 잡으면 다시 예전 동작이 나와 ‘나한테 편한 폼이 제일 폼’이라고 생각을 바꿔 먹었다.

 

  학생 야구선수들이 쓰는 은어 중에 무단이탈을 이르는 ‘빠삐용’이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는 펑펑 울면서 코치님의 손을 잡고 빌었다. “제발, 1년만 더 있게 해주세요. 이제 막 재활 끝났으니, 내년부터는 잘 할 거예요. 다시는 말썽 일으키지 않도록 할게요.” 그때 1초가 한 시간 같았다.

‘빠삐용’ 사건으로 인생의 바닥을 쳤던 걸까? 그 뒤로 신기하게도 배배 꼬이기만 했던 삶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냥 대놓고 소리를 질러라. 너무 훤히 보이게 내는 거 아니냐?”

“뭔 상관이야. 어차피 90% 직구인거 저쪽에서도 다 아는데, 알아도 못 치잖아.”

그 덕에 시력이 좋지 않은 나는 맨눈으로 대학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

 

  대학 졸업반 어느 날 프로구단과 연습경기를 마친 뒤였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고 있던 그때, 코치님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축하한다, 삼성이다.”

손가락으로 어깨를 만져보라던 이성근 스카우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반기 마지막 3연전의 장소는 제주도였다. 시범경기에 이어 다시 한 번 현대와 맞붙게 돼 있었다. 호텔방에 들어와서 잠깐 눈이나 붙일까 하고 있는데 전화기 벨이 울렸다. 양일환 코치님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감독님이랑 이야기했다. 오늘부터 맨 뒤에 대기해라. 임시 아니라 정식 마무리야. 잘해봐라.”

그렇게 ‘9회 말 인생’이 시작됐다.

 

  한국시리즈 상대는 한화를 꺾고 올라온 두산이었다. 5회 박종호 선배의 부상으로 백업요원으로만 뛰던 재걸 선배가 대타로 나왔다. 불펜에 나와 있던 구원투수들 모두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다들 재걸 선배가 1경기에 2루타 2개를 친 건 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고막이 터질 듯한 환호성 속에서도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미 오준이 형이 6회와 7회를 무실점으로 막았다. 나도 2이닝을 던져야할 것 같았다. 1아웃 1, 2루에서 최경환 선배를 삼진으로 잡아 한숨을 돌렸다. 마지막 타자 손시헌 선배를 좌익수 뜬공으로 잡고 한국시리즈 첫 세이브를 올렸다.

“한국시리즈 우승하면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뭔지 아냐? 술 취해서 당당하게 숙소 정문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거야!!” 한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꿈같았던 하루, 아니 한 시즌이 그렇게 몽롱한 행복으로 끝났다.

 

 

 

  검진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수술 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참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통증은 이틀 만에 다 가라 앉았다. 독하게 재활에만 몰입했다. 2010년의 마지막 날, 놀라운 소식이 괌까지 전해졌다. 선동열 감독님이 물러났다. 얼마 전까지 캠프 준비상황을 체크하셨기에, 구단이 발표한 ‘자진 사퇴’라는 공식 입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박재홍 선배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감독님에 대한 죄송함과 함께, 나도 벼랑 끝에 있다는 현실이 새삼 생생하게 느껴졌다.

 

  2011년 만 29세 28일은 세계 최연소 기록이자, 한·미·일 통틀어 최소 경기 200세이브 기록이었다. 나는 334경기에 나서 200세이브를 올렸고, 미국의 조너선 파벨본 359경기, 일본의 사사키 가즈히로는 370경기 만에 200세이브를 기록했다. 대구구장에서 축하 폭죽쇼가 시작됐다.

 

 

  한국 프로야구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은 김용수 선배님이 가지고 계셨다. 대선배와 기록을 비교한다는 게 쑥스러웠지만 선배의 기록을 깨는 게 후배가 할 일 아니겠나. 2012년 7월 24일 대구구장 경기 클리닝 타임에 개인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 달성 축하 행사를 가졌다. 구본능 KBO총재로부터 기념 트로피를, 김인 삼성 라이온즈 사장님에게 격려금을 받았다. 경기 전에는 대구구장 앞에서 228명에게 사인해주는 행사도 했다.

 

  해외 무대에 도전하고 싶은 꿈은 서른에 접어들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구단의 허락 없이는 해외에 진출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래서 구단에 해외 진출을 하고 싶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하지만 구단에서는 날 놓아주는 대신, 통합 3연패를 함께 이루자고 제안했다.

2013시즌이 개막했을 때 내 통산 세이브 개수는 249였다. 삼성은 1승 3패,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막판 3연승으로 우승을 차지한 팀은 없었다. 확률은 6.9%에서 0%로 줄었다. 하지만 이전까지 3연패를 달성한 팀도 없지 않았던가. 우리는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고 있었다.

 

  내가 겪은 그 어떤 한국시리즈보다 힘든 승부였다. 하지만 이겨낸 후의 과실은 정말 컸다. 통합 3연패를 달성하니 야구인생에서 가장 큰일을 해낸 것 같았다. 해외진출을 꿈꾸던 내게는 마지막 추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켠이 시렸다.

 

  삼성 구단이 공식적으로 나의 해외 진출을 돕겠다고 발표했다. 행선지도 내게 일임했다. 해외 진출을 이런저런 이유로 막는 구단도 많은 마당에, 삼성은 정말 큰 도움을 줬다. 진심으로 감사했다. 계약기간 2년, 계약금 2억 엔, 2년간 연봉 3억 엔에 연간5,000만 엔의 인센티브가 따라붙는다. 최대 총액 9억 엔의 대형계약이었다.

 

  ‘오승환을 알몸으로 만들겠다!’라며 요미우리가 날 낱낱이 해부하겠다고 호언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사실 몇 개월 전만해도 요미우리는 나를 원하던 구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미 나는 한신의 일원, 요미우리는 우승을 위해 반드시 꺾어야 하는 상대였다. 이노 오사무 심판 기술위원장 겸 야구규칙위원이 내 투구폼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투구폼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어 홀가분했다.

 

  “오승환과 맞대결할 기회조차 만들지 않겠다. 오승환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최고의 시나리오다.” 대호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 입장에서도 마운드에 올라간다면 대호는 잡아내야 할 타자일 뿐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랬듯, 우리가 첫 번째로 바라는 건 팀의 승리다.

7월 21일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는 1이닝 무실점으로 팀의 3대 0 승리를 지켜냈다. 시즌 23세이브이자 한일 통산300개째 세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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