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마이클 샌델 지음 / 안진환‧김선욱 옮김 / 와이즈베리 펴냄

 

 

 

비열한 타락

  과거에 모든 주에서 불법이었던 복권사업은 언제부턴가 갑자기 주정부 수입의 원천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복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도박이 부도덕한 행위라는 근거를 댄다. 그런데 이러한 반대론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힘을 많이 잃었다.

  그렇다면 주정부가 운영하는 복권사업은 무엇이 문제일까?

  시카고의 한 빈민가에 세워져 있는 대형 복권 광고판에는 “이것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티켓이 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복권 광고는 엄청난 대박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그래서 더 이상 뼈 빠지게 일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는 환상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다.

  복권사업이 가져다주는 수익에 중독되어 있는 한, 주정부는 주민들에게, 특히 가장 취약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적 삶을 지탱하는 노동과 희생, 도덕적 책임의 윤리와 상충되는 메시지를 계속 퍼부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공공 역역의 타락은 복권이 야기하는 가장 중대한 해악이다.

 

오염 배출권

  1997년 교토 기후변화 회의에서 미국은 두 가지 중요한 이슈에 대해 개발도상국들과 의견 충돌을 빚었다. 첫째로 미국은 개발도상국들이 온실가스 배출 제한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둘째로 온실가스 거래 제도가 시행되어 국가들이 온실가스 배출권을 사고팔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 제도는 세 가지 이유에서 반대할 만하다.

첫째, 오염 배출권 거래 제도는 부유한 나라들이 의무 감축량을 피해갈 구멍을 만들어 준다.

둘째, 오염 배출권을 사고팔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면 오염 유발 행위에 붙어 마땅한 도덕적 낙인을 제거

        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오염 배출권 거래 제도는 갈수록 국제사회 공조가 늘어나는 오늘날 더욱 필요한 인류 공동의 책임

      감을 약화시킬 수 있다.

 

영광과 자격 그리고 분노

   15세인 캘리는 웨스턴 텍사스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치어리더다. 캘리는 뇌성마비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소녀였지만 1년 동안 치어리더로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자 캘리는 응원단에서 쫓겨났다. 가을 초 그녀는 명예 치어리더로 격하되었으며, 얼마 후 그 자리마저도 아예 없어졌다.

특히 치어리더 단장의 아버지가 캘리의 활동에 반대했다. 그는 단지 캘리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캘리의 어머니는 캘리가 받는 갈채에 대한 그의 분노가 반대의 동기라고 의심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도 뛰어난 치어리더가 될 수 있다면, 다리 뻗기와 공중회전을 잘하는 사람이 얻는 영광은 그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돌아간 영광에 대한 분노는 오늘날 정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도덕 감정이 며, 이는 때로 공정성과 권리에 관한 논쟁을 더욱 뜨겁게 달군다.

 

거짓말과 칸트

  교묘한 얼버무림과 노골적인 거짓말 사이의 도덕적 차이는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거짓말과 기술적으로 진실한 발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거짓말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모든 언명에 있어 진실(정직)은 그 어떤 편의주의도 허용치 않는, 무조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신성한 이성적 원칙이다.”이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칸트는 자신이 종교철학 저서로 인해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빌헬름 2세와 검열 당국은 칸트에게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그 어떤 강연이나 저술도 삼갈 것을 요구했다. 칸트는 말을 골라 이렇게 약속했다. “국왕 전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저는 앞으로 종교와 관련된 모든 공개 강연이나 저술 활동을 완전히 중지할 것입니다.”

  몇 년 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자신이 한 약속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그 약속은 “(현) 국왕의 충직한 신하”로서만 그를 구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그때 정말 신중하게 말을 골라 답했다. 내 자유를 영구히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 단지 국왕이 생존할 때에만 제한 받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현명한 얼버무림으로 이 프로이센 도덕의 전형은 거짓을 말하는 일이 검열 당국을 현혹시키는 데 성공했다.

 

자유주의 이상과 공동체주의의 충고

  자유주의자들은 특정한 충성과 의무,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동선의 정치가 선입견과 편협한 태도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 생활의 다양성과 규모를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윤리는 기껏해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에 불과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을 기반으로 통치를 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적 유혹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은 편협한 태도란 삶의 형태가 혼란스럽고 근원이 불안정하며 전통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가장 융성한다고 대응한다. 나 역시 이러한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듀이의 자유주의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

  존 듀이는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가였을 뿐 아니라, 학계를 넘어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정치와 교육, 과학과 종교 등에 대해 글을 쓴 공공 지성인이었다.

  앨런 라이언은 “듀이의 자유주의는 다르다. 그것은 명백히 인간의 품위와 필요, 이익을 확대하고 진보시키는 데 전념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세계관, 좋은 삶의 구성요소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견해 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종교적 논쟁에서 편을 들고 권리의 옹호에 집착하지 않는다. (·····) 듀이의 자유주의가 찬양하는 개인은 자신의 일과 가족, 지역 공동체, 그 공동체의 정치에 철저하게 관여하고, 강요나 위협, 타의에 의해 공동체 활동을 하지 않으며, 당면한 책무에 몰두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자기표현의 장으로 공동체를 보는 사람이다.”

 

인간이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은 잘못인가?

  하트만 신학의 중심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의 여지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제한하는, 자기제한적인 존재로서의 신개념이다.

  과학이나 기술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 인간 신격화에 해당하는 행위가 되는, 즉 신의 역할을 빼앗는 오만한 도전이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과거 랍비의 시대에는 의사의 치료 행위를 치유자로서의 신의 역할을 침범하는, 용인할 수 없는 행위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탈무드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의사에게는 치료의 권한이 허락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베라코트 60a)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

  롤스는 자유주의의 논거가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정치적이며. 따라서 자아늬 본성을 다룬 논쟁적인 주장들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것은 칸트의 도덕철학을 정치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현대 민주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대체로 선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는 익숙한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인 것이다. 사람들의 도덕적·종교적 신념이 하나가 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그러한 논쟁과 관련해 중립적인 정의 원칙에 대한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롤스를 기억하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영미 정치이론은 언어 분석과 도덕적 상대주의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면서 사실상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롤스는 정의, 권리, 정치적 의무에 대해 이성적으로 논증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이론을 소생시켰다. 그는 신세대가 도덕성과 정치학의 고전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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